<살며생각하며>오페라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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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팀 작성일09-10-08 16:54 조회18,172회 댓글0건본문
음악은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묘약이다. 이 묘약과 사랑에 빠진 지 50여년. 하나님은 내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으니 그 첫째가 아름다운 음악을 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음악을 통해 사회 활동을 하도록 오페라단을 창단하게 해주신 것이다. 이는 오페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과 음악을 통해 교감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창조하게 하려는 뜻이 아닐까….
1970년대 우리 클래식계는 아주 열악했지만 선배들의 노력으로 적지 않은 공연이 열렸다. 난 항상 공연장에 가면 아름다운 리듬에 빠져 꿈을 꿨다. 특히 오페라 관람 때는 장면 장면을 좀더 다르게 구상하며 무대 디자인, 의상 색상, 영상 처리 등을 나름대로 연출해보기도 했다. 결국 이런 모든 것이 계기가 되어 더 넓은 세계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자 유학길에 올랐다. 그 시절 꿈에 그리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했을 때 감격에 겨워 단숨에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17년 전 다윗의 시편을 읽으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과 함께 꼭 이 말씀에 부응하는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오페라단을 창단했다. 창단 공연으로 그동안 자주 무대에 오르지 않았으면서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작품을 택해야겠다는 욕심으로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선정했다.
막상 작품을 고르고 나니 주역 성악가를 찾을 수 없어서 수소문 끝에 유럽에서 주인공과 연출가를, 미국에서 지휘자를 초청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렸다. 당시로서는 4일간 4000석 객석에서 공연한다는 데 대해 모두들 풋내기 오페라단장의 무모한 도전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창단 공연치고는 초유의 성공으로 전일 90% 이상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1995년 광복 50주년, 한·일 수교 30주년을 맞아 장일남 작곡의 우리 창작 오페라 ‘춘향전’을 일본 도쿄 히도미 홀에서 공연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준비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본 땅에서 최초로 한국어 오페라를 공연한다는 사명감으로 이겨냈다.
칼을 목에 쓴 옥중의 춘향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꿈에 만난 이도령을 그리는 아리아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덕분에 일본 신문들에 대서특필되면서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았다.
2000석의 객석 가운데 70% 이상이 일본인 관객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국경을 초월한 예술의 힘을 느꼈다. 정년퇴직한 일본 노인들은 몇달 전부터 공연과 전시회 티켓을 예매해 놓고 그날 어떤 의상을 입고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보다 160년이나 앞서 오페라를 공연한 나라의 예술 애호 정신이 부럽기만 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한국 문화의 밤’ 행사 일환으로 미 애틀랜타 클레이턴 아트 홀(1800석)에서 ‘춘향전’을 공연했던 기억도 새롭다. 당시 150명의 단원이 현지 호텔을 예약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가 구세주로 나타났다. 에모리대 총장을 지낸 그가 대학 측에 연락해 기숙사를 숙소로 사용하도록 주선해준 것이다.
2004년 한·프랑스 문화교류 기념으로 파리 모가도 극장(1800석)에서 가진 ‘춘향전’ 공연 때는 프랑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새삼 예술하는 보람을 느꼈다. 당시 어느 프랑스 기자로부터 “춘향은 왜 한 남자를 위해 절개를 지켜야 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끄는 오페라단은 미국, 일본, 프랑스, 호주 등 해외 공연과 함께 매년 국내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우리 예술인들에게도 실력만 있다면 언제든지 무대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고 싶다. 공연을 통해 후배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이것이 국민 정서 함양과 문화 수출로 이어져 국위 선양과 문화 산업 발전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된다면 더 없는 보람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세계 유수 성악가들과 비교해봐도 우리나라가 최고의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은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우수한 인력을 활용해 문화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게 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제1한강대교 옆 노들섬에 세계적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하자는 제안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반대 쪽은 수천억원을 들여 무슨 오페라 하우스냐고 비난한다. 물론 비용 문제는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시드니의 조개 껍데기 모양 오페라 하우스를 예로 들어보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호주의 문화 상징이자 강력한 관광 상품으로서 건립 당시 호주의 예상보다 수천 배의 경제적·문화적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
그곳에서 공연을 관람하다가 휴식 시간에 객석 문을 열고 나가 파도가 출렁거리는 곳에서 음료수를 마셔보라. 바로 그것도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신선하고 청량한 느낌으로 다가오며 절로 다음 막이 기다려질 것이다. 10여년 전 브라질 아마존 밀림에 가는 길에 마나우스라는 작은 도시를 찾은 적이 있다.
지금도 마나우스 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아주 화려한 황금장식을 한 오페라 소극장의 기억이 생생하다. 왜 우리는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가. 이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어떤 길이 바람직할지 진지한 고민을 한 뒤 발상을 혁신적으로 전환해야 할 때가 왔다.
2월26일 국내 36개 민간 오페라단이 가입한 한국오페라단연합회가 발족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내가 초대 회장에 선출돼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연합회는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질식 위기에 처한 클래식 음악을 되살리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구체적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오페라인들의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은 우리 삶의 근본을 이루는 문화 활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예술 장르다. 이는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사회에 이른 지금도 변함 없는 사실이다. 선진국들이 클래식 음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범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하는 것은 각박하고 황량한 일이다. 그래도 평생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에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남은 인생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양수화 / 한국오페라연합회장, 글로리아오페라단장]]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09-10-08 16:54:58 전문가 칼럼에서 복사 됨]1970년대 우리 클래식계는 아주 열악했지만 선배들의 노력으로 적지 않은 공연이 열렸다. 난 항상 공연장에 가면 아름다운 리듬에 빠져 꿈을 꿨다. 특히 오페라 관람 때는 장면 장면을 좀더 다르게 구상하며 무대 디자인, 의상 색상, 영상 처리 등을 나름대로 연출해보기도 했다. 결국 이런 모든 것이 계기가 되어 더 넓은 세계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자 유학길에 올랐다. 그 시절 꿈에 그리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했을 때 감격에 겨워 단숨에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17년 전 다윗의 시편을 읽으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과 함께 꼭 이 말씀에 부응하는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오페라단을 창단했다. 창단 공연으로 그동안 자주 무대에 오르지 않았으면서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작품을 택해야겠다는 욕심으로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선정했다.
막상 작품을 고르고 나니 주역 성악가를 찾을 수 없어서 수소문 끝에 유럽에서 주인공과 연출가를, 미국에서 지휘자를 초청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렸다. 당시로서는 4일간 4000석 객석에서 공연한다는 데 대해 모두들 풋내기 오페라단장의 무모한 도전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창단 공연치고는 초유의 성공으로 전일 90% 이상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1995년 광복 50주년, 한·일 수교 30주년을 맞아 장일남 작곡의 우리 창작 오페라 ‘춘향전’을 일본 도쿄 히도미 홀에서 공연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준비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본 땅에서 최초로 한국어 오페라를 공연한다는 사명감으로 이겨냈다.
칼을 목에 쓴 옥중의 춘향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꿈에 만난 이도령을 그리는 아리아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덕분에 일본 신문들에 대서특필되면서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았다.
2000석의 객석 가운데 70% 이상이 일본인 관객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국경을 초월한 예술의 힘을 느꼈다. 정년퇴직한 일본 노인들은 몇달 전부터 공연과 전시회 티켓을 예매해 놓고 그날 어떤 의상을 입고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보다 160년이나 앞서 오페라를 공연한 나라의 예술 애호 정신이 부럽기만 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한국 문화의 밤’ 행사 일환으로 미 애틀랜타 클레이턴 아트 홀(1800석)에서 ‘춘향전’을 공연했던 기억도 새롭다. 당시 150명의 단원이 현지 호텔을 예약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가 구세주로 나타났다. 에모리대 총장을 지낸 그가 대학 측에 연락해 기숙사를 숙소로 사용하도록 주선해준 것이다.
2004년 한·프랑스 문화교류 기념으로 파리 모가도 극장(1800석)에서 가진 ‘춘향전’ 공연 때는 프랑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새삼 예술하는 보람을 느꼈다. 당시 어느 프랑스 기자로부터 “춘향은 왜 한 남자를 위해 절개를 지켜야 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끄는 오페라단은 미국, 일본, 프랑스, 호주 등 해외 공연과 함께 매년 국내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우리 예술인들에게도 실력만 있다면 언제든지 무대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고 싶다. 공연을 통해 후배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이것이 국민 정서 함양과 문화 수출로 이어져 국위 선양과 문화 산업 발전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된다면 더 없는 보람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세계 유수 성악가들과 비교해봐도 우리나라가 최고의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은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우수한 인력을 활용해 문화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게 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제1한강대교 옆 노들섬에 세계적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하자는 제안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반대 쪽은 수천억원을 들여 무슨 오페라 하우스냐고 비난한다. 물론 비용 문제는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시드니의 조개 껍데기 모양 오페라 하우스를 예로 들어보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호주의 문화 상징이자 강력한 관광 상품으로서 건립 당시 호주의 예상보다 수천 배의 경제적·문화적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
그곳에서 공연을 관람하다가 휴식 시간에 객석 문을 열고 나가 파도가 출렁거리는 곳에서 음료수를 마셔보라. 바로 그것도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신선하고 청량한 느낌으로 다가오며 절로 다음 막이 기다려질 것이다. 10여년 전 브라질 아마존 밀림에 가는 길에 마나우스라는 작은 도시를 찾은 적이 있다.
지금도 마나우스 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아주 화려한 황금장식을 한 오페라 소극장의 기억이 생생하다. 왜 우리는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가. 이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어떤 길이 바람직할지 진지한 고민을 한 뒤 발상을 혁신적으로 전환해야 할 때가 왔다.
2월26일 국내 36개 민간 오페라단이 가입한 한국오페라단연합회가 발족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내가 초대 회장에 선출돼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연합회는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질식 위기에 처한 클래식 음악을 되살리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구체적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오페라인들의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은 우리 삶의 근본을 이루는 문화 활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예술 장르다. 이는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사회에 이른 지금도 변함 없는 사실이다. 선진국들이 클래식 음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범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하는 것은 각박하고 황량한 일이다. 그래도 평생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에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남은 인생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양수화 / 한국오페라연합회장, 글로리아오페라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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